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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글/책

돼지꿈


  학교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서 황석영 작가의 돼지꿈을 꺼내 집었다. 나는 전용 열람실보다 대출 자료실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데, 공부하다 심심하면 주변 서가에서 책을 꺼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서가에서 가져온 책을 모두 읽는 것은 아니고 단지 책상 위에 쌓아두기만 하고 결국 책을 펴보지도 못한 채 다시 서가에 꽂고 집에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지난 학기에 나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두 수업 사이의 비는 시간이 길어 그 시간을 주로 도서관에서 보냈다. 나는 도서관 대출 자료실의 넓고 하얀 탁자와 그 탁자들이 길게 펼쳐져있는 풍경을 좋아했지만 그럼에도 한 자리에 1시간 넘게 앉아 있는 게 신체적으로나 기분적으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래 앉아 공부를 할 땐 두 시간 넘게 책상에 앉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때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한 시간 가량을 앉아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기를 반복했다. 화장실에 가면 꼭 손을 씻었다. 도서관에는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2층 대출 자료실 옆 화장실의 수돗물은 다른 건물 화장실의 찬 물에 비해 유독 차가워서 꼭 한겨울 산속 얼음장 같은 개울물에 손을 씻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다시 대출 자료실로 가면 열람실에 가기 전에 신간 코너 앞에 서서 어떤 책이 있는지 구경하는 습관이 있었다. 황석영의 돼지꿈은 그렇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내가 빚은 나의 습관을 따라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다시 열람실로 돌아가는 길에 집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당연히 신간 코너라고 생각했던 그 서가는 신착 코너일 수도 있겠다. 황석영 작가의 '삼포 가는 길'만 해도 내가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읽어봤던 소설이니, 여러 소설을 묶은 그 소설집이 신간 코너에 있기보다는 신착 코너에 있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책의 제목인 돼지꿈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객지, 삼포 가는 길, 철길, 탑, 야근 등등의 단편 소설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삼포 가는 길'을 읽은 이후로 처음 읽은 황석영 작가의 소설들은 전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들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소설들이 어떤 시기를 다루고 있는지 하나하나 짝을 맞춰 열거할 재주는 없고, 다만 6.25 이후부터 80년대 군사 독재 시절과 맞물린 고속 개발의 시대가 그 소설들 속에 녹아들어있지 않았나. 어렴풋한 추측 정도만 가능하다. 각각의 소설들은 다양한 환경과 인물들을 그려내는데, 소설집을 다 읽은 지금 떠오르는 소설 속 인물들은 주로 노동자들과 군인들이다. 황석영 작가는 어떤 사상가들에 의해 노동자 계급과 하류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삶과 상황과 언어를 소설 속에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나는 황석영 작가가 소설 속에 그 시기와 사람들의 삶을 잘 담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격동의 시기라고 쉽게 말해지는 그때 그 시절에 무언가를 위해 무던한 척 하며 싸웠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고, 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대에 의해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반응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을 한 숟갈 빼앗아 먹거나, 영문도 모른 채 무엇에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거나,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감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행동은 단지 소설로 읽은 뿐인데도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 동시에 그런 것들은 소설 속의 세계나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나 삶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과 상황인가 하는 생각에 어떤 불가항력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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