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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글/책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 무라카미 하루키)

 

 


사린(Sarin)은 액체와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독성이 매우 강한 화합물로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킨다.

 

1995년 3월 20일 도쿄의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가 든 봉지가 발견되었다. 사린이 든 봉지는 한 개의 기차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도쿄의 땅 밑을 종횡으로 연결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나르던 여러 개의 노선에서 발견되었고, 발견되기 이전에 날카롭게 간 우산 끝에 의해 터져 있었다. 그리고 그전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그곳에 운반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삼은 명백한 테러였다.

 

사린 가스로 인해 일반 시민과 지하철 직원을 포함 총 13명이 사망하였고, 5,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부상자의 규모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어느 자료를 보더라도 사망자는 13명으로 동일했다.

 

독가스 테러를 일으킨 테러리스트들은 총 5명으로 모두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집단에 소속되어있었다.

그들은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명령을 하달받아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집필한 '언더그라운드'는 옴진리교 사린 가스 테러가 발생하고 2년 정도가 지나는 시기에 출간되었다. 작가는 사린 가스 테러의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그중 62명과 진행한 인터뷰의 내용을 책에 싣었다.

 

작가는 인터뷰를 기획할 때, 피해자들을 '상처 받은 순진한 일반시민'이라는 이미지로 고정시켜버리는 매스컴의 고정된 도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승객들에게도 개성적인 얼굴이 있고, 생활이 있고,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갈등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모순과 딜레마가 있고, 그것들을 종합한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본문 22페이지)

 

그래서 책을 구성하는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그들이 테러를 마주한 시점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인터뷰는 피해자들 개개인의 배경(간략하게 직업과 나이만 밝히는 경우부터 고향과 가족관계, 그리고 성격까지 설명해주는 경우 등 그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테러가 발생했던 날 아침부터 테러를 마주한 순간, 그 이후에 이어진 삶의 전개까지 설명하는 식으로 인터뷰와 책은 구성되어있다.

 


 

책을 덮고 나서 내가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해보니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사린 가스를 마신 이후 피해자들의 증상,

사린 가스가 퍼진 이후 지하철역과 주변의 상황 묘사,

그리고 책 한 페이지도 안 되게 읊조린 피해자들의 옴진리교에 대한 분노가 머릿속에 아직 남아있다.

 


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들어만 봤지 그것의 증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교통사고 후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전쟁 중에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말만 떠올랐고 일상으로 엄습하는 증상의 체험에는 가닿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이 책에서 사린 테러 이후 피해자들의 PTSD에 대해 이야기해 준 어느 의사의 이야기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만 사건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바닥 모를 공포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린의 공포,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언어화된 적이 없었습니다. 미증유의 사건이지요. 그 때문에 피해자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 당시의 공포를 아직 언어화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적절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자신의 느낌을 언어로 바꾸는, 즉 의식화하는 회로가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눌러버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의식적으로 눌러도 신체는 자연스럽게 반응해버립니다. 그것이 '신체화'입니다."(본문 중)

 


 

사린 가스를 마시고 길든 짧든 입원 기간을 거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시력 저하, 기억력 감퇴, 피로 등의 공통된 후유증을 가지고 있었다. 후유증을 가지고 사람들은 일상에 다시 탑승했고 그 속에서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가는 거의 모든 인터뷰 말미에 테러를 자행한 옴진리교와 테러범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에 대해 묻는다. 대답은 제각각 다르다. 옴진리교에 치가 떨리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피해자도 있었고, 테러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하다시피 했던 시스템에 불만과 분노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별 다른 감정 없이 그저 습격받아 훼손된 일상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만하고 앞으로의 일상에 집중해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린 가스를 흡입한 사람들은 처음에 달큰하면서도 시큰한 냄새를 느꼈다고 한다. 참을 수 없이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고 한다. 독가스에 노출되고 얼마 되지 않아 동공이 수축되어 주변이 어둡게 보였고, 급격한 기침과 몸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방송을 듣고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플랫폼에서, 역사 밖으로 나와 도로에서 사람들이 마주친 상황은 재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플랫폼과 거리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그 순간은 마치 영화적 재난의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을 마주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오는 걸 느끼는 와중에도 더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지하철 직원도 있었고 그냥 자신의 갈 길을 가던 시민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사린 가스로 인해 몸이 성치 않았다. 그중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을 돕다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작가는 사린 가스 살포 테러라는 인재(人災), 그리고 범죄 행위에서 일본 사회의 어떤 면을 보려고 한 것 같다. 그건 비단 나쁜 점만이 아니라 말 그래도 '어떤' 면들이다. 작가는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만의 배경을 낱낱이 살핀 후에 그것에서 어느 사회의 나쁜 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들의 배경과 삶 역시 살펴보아 그 사회의 어떤 면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런 작가의 방법론이 분명 그동안의 불충분했던 시선에 채워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난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 예상치 못한 재난이든 예상된 재난이든 마찬가지이다.

예상된 재난이라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재난이 휩쓸고 간 후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상된 재난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위로나 효용도 없다. 우리는 '예상된 재난'이 아니라 '예방된 재난'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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